북관 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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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關大捷碑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臨溟)에 있던 비석. 조선 숙종 때, 북평사(北評事) 최창대(崔昌大)가 고장 노인들과 함께 세운 것으로, 임진왜란 때의 북관 대첩을 기린 비이다. 비문 중 "고단하고 미약한 데서 일어나 도망하며 숨은 무리들을 분발시켜 마침내 완전한 승첩을 거두다."라는 대목은 북관 대첩의 주역인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 1565~1624)의 공(功)을 잘 집약한 것이다.

러일 전쟁 중이던 1905년, 일본군의 미요시 중장이 북관 대첩비를 그대로 둘 경우, 일본군의 북진 시 조선인들의 저항을 받을 수 있으니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일본 황실에 타전했고 이를 승인 받아 일본으로 약탈 반출하였다. 그 뒤 일본 황실에서 보관하다가 야스쿠니 신사로 옮겨졌다. 2005년 10월 12일 우리나라와 일본 정부는 북관 대첩비 인도 문서에 서명하였고, 10월 20일 대한항공 화물기 편으로 우리나라로 반환되었다.





[참고 기사]

"아, 나라가 망하는데 집을 어찌 보존할 수 있으며, 아버지가 있는 터에 자식이 어디로 가겠는가. …힘은 약하고 성은 고립돼 비록 위험하다고 할지라도 명목이 정의롭고, 할 말이 당당하니 승리할 수 있다. 부질없는 의심을 버리고 강개한 마음을 다지라."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토가 유린당하자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鄭文孚)는 창의토왜(倡義討倭.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함)의 격문을 썼다. 당시 28세의 약관으로 관직(정6품)도 낮았지만 백성은 그를 신망했기에 구름처럼 모였다.
그의 의병은 반역자부터 응징했다. 임란 발생 3개월 만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대가 함경도를 장악하자 조선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박해 왜군에 넘긴 무리부터 처단한 것이다. 정문부는 이어 장평.임명.단천 전투 등에서 왜적을 격파했다.
1593년 1월 백탑교 전투에선 의병 3000명으로 왜군 2만 명을 물리쳤다. 가토는 길주에 고립된 왜군을 구하기 위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나섰지만 지리를 이용한 정문부의 기습작전에 걸려 패주하고 말았다. '시즈가타케의 일곱 창(七本槍)'이란 별명에, 일본 최고의 무사라는 소리를 들었던 가토도 우리 의병의 지략과 용맹을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정문부 의병의 크고 작은 승리를 통틀어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고 한다. 숙종 때는 그걸 기념하는 비를 길주에 세웠으니, 그게 북관대첩비다. 비문 중 "고단하고 미약한 데서 일어나 도망하며 숨은 무리들을 분발시켜 마침내 완전한 승첩을 거두다"는 대목은 충의공(忠毅公) 정문부의 공(功)을 잘 집약한 것이다.
1905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이 비석을 약탈, 군국주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해 두었다. 그렇게 하면 임란 때의 치욕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북관대첩비가 100년 만에 돌아온다. 민간의 끈질긴 노력과 남북의 공조가 결실을 본 것이다. 북관대첩비는 한동안 남한에 전시된 뒤 길주로 돌아간다고 한다. "나라를 걱정하는 붉은 마음에 머리카락 올올이 세는구나(丹心憂大國 一一髮生痕)"라고 했던 충의공의 조국애가 북관대첩비와 함께 길이 보존됐으면 좋겠다.
<중앙일보. 2005.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