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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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 소장 박정희(朴正熙. 1917~1979)의 주도로 육군 사관 학교 8기생 출신 군인들이 제2공화국을 폭력적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 정변. 5·16 군사 정변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문제와 군(軍)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구파 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다양한 사회 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여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혁신계 정치 세력의 부상과 학생 세력의 진출은 민족 자주화 운동, 통일 촉진 운동으로 전개되어 반공 분단 국가의 근본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6·25 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 신장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되어 있던 군부 내에서는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부패(不正腐敗)와 승진의 적체 현상을 공격하는 '하극상 사건(下剋上 事件)'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소장 박정희와 중령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8기생들은 1960년 9월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 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 기관을 점령하였다. 군사 혁명 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권을 장악하면서 군사 혁명의 성공과 6개 항의 '혁명 공약'을 발표하였다. 그 6개 항이란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군사 정변은 초기에 미8군 사령관 C.B. 매그루더, 야전군 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 표명, 장면(張勉)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하였다. 군사 혁명 위원회는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재편하여 3년간의 군정 통치에 착수하였다. 군정 기간 중 군사 혁명 세력은 '특수 범죄(반혁명, 반국가 행위) 처벌법', '정치 활동 정화법' 등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 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 권력 기구로서 '중앙 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 공화당'을 조직한 후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시행하였다. 1963년 말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제3공화국은 정식 출범하였다. 반공 분단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권력을 지향한 군부 세력이 불법적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정복하여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후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나, 군사 문화의 사회 확산, 군의 탈법적 정치 개입의 선례를 남겼으며, 민주적 정권 교체의 지연, 산업화의 지역·계층 간 불균형 등의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