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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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5월 4일 중국 베이징[北京]의 학생이 일으킨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혁명 운동.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며, 또한 근대사·현대사의 새로운 기원을 여는 시기로 평가되기도 한다. 당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유럽 열강이 중국 침략의 고삐를 늦추고 있을 때, 일본은 21개 조항 요구 등으로 중국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대전이 끝나자 독일에 대한 전승국인 일본·영국·프랑스·이탈리아·미국 등은 파리에서 평화 회의를 개최하고, 독일이 중국 산둥성에 가지고 있던 권익을 일본에게 양보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분격한 베이징의 학생은 5월 4일 데모를 벌여 반대의 기세를 올렸다. 학생들 사이에는 이미 21개 조항 요구 반대 운동의 경험이 있었고, 또한 베이징 대학을 중심으로 한 문학 혁명(文學 革命: 1917) 이후의 신문화 운동도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이 5·4 운동은 애국 운동에 그치지 않고, 봉건주의에 반대하고 과학과 민주주의를 제창하는 문화 운동의 요소를 띤 광범한 민중 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이징의 군벌 정부는 즉시 탄압에 나서서 30여 명을 체포하였다. 학생들은 스트라이크로써 대항하였는데 톈진[天津]·상하이[上海]·난징[南京]·우한[武漢]에까지 미쳐 민족 위기를 호소하고 국산품 장려, 일본 상품의 불매(不買) 등을 외쳤다. 6월 3일 군벌 정부는 대규모 탄압을 감행하여 학생 약 1,000명을 체포하였다. 6월 3일의 이 사건은 광범한 민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어, 6월 5일부터 상하이 기타 도시에서의 노동자의 파업, 상점의 폐쇄 등으로 나타났으며, 전국의 각계 단체의 연합인 통일 전선 조직이 성립되었다. 그러자 군벌 정부도 파리 평화 회의의 조인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지식인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조선의 3·1 운동에 고무되고 러시아 혁명의 영향도 있어 그 후 노동 운동, 농민 운동 등 대중 운동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